0818. 목.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팀의 일원으로 철원 DMZ 민통선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아침 7:45 학교에서 출발해 밤 11시에 끝난 강행 일정이었지만 뜻깊은 답사였다. 양지리 철새학교 방문을 시작으로, 토교저수지, 월정리역, 철원두루미관, DMZ평화문화광장, 철원평화전망대, 노동당사, 소이산, 수도국지 등을 둘러봤다.
내게 통일이란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념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통일에 대한 나의 바람은 단순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비롯된다. 통일이 되어야 끊어진 3번국도를 타고 금강산을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통과해 유럽으로 가는 대장정의 길,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옛 길과 새로운 삶의 길'이 동시에 열린다. 그래야 이 갑갑하고 답답한 한국사회가 열린다. 해서 나는 소망한다. 이 땅의 옛 선인들이 그랬듯이 나의 애마를 몰고 3번 국도를 따라 유라시아의 길을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길...
이번 답사를 통해 또 하나의 절실한 바람이 보다 명징해 졌다. 남북이 대화와 상생 대신에 극한 대결로 각자 체제 유지만 강화하며 공멸로 치닫는 신냉전 시대를 넘어서 교류 협력해 끊어진 역사의 조각들을 함께 이어가야 한다는 것.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이 서편에 걸릴 때, 해발 362.3미터의 소이산에 올라 바라본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의 파노라마는 한마디로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다, 막힌 숨통을 뻥 뚫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체험이다. 호연지기가 절로 샘솟는다. 째째하고 구질하게 살지말고 좀 통 크고 호탕하게 살순 없는가.
철원을 가끔 다녔지만 해질무렵 소이산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이곳에는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해 회령, 함흥, 안변을 거쳐 양주와 서울 남산으로 향하는 경흥선 봉수로의 봉수대가 있고, 정상에 전망대가 있다.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정상에 서면 광활한 철원평야 뒤로 멀리 북쪽 정면에 지평선을 이루는 평강고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왼편 서쪽에 백마고지, 피의능선, 고암산으로 이어진 범상치 않은 산세와 평강고원 오른편 동쪽에 낙타고지와 오리산 등이 보인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왜 궁예가 송악산이 있는 개경(개성)이 아니라 철원 이곳에 태봉국 왕도를 세웠는지 저절로 알게된다.
궁예도성은 토성으로 축조된 평지성으로 지형을 놓고 볼 때 웅장한 자태의 고암산(해발 780m)을 서쪽에 진산(鎭山)으로 삼았을 것이다. 옆으로 피의능선과 백마고지로 이어지는 산세가 궁성을 호위무사처럼 에워싼 천혜의 지형이다. 궁예는 901년 고구려의 정기를 계승해 고려(후고구려)를 세우고, 905년 철원으로 수도를 옮겨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변경했다. 따라서 태봉국이 고구려의 정기를 계승했다면 오늘날 철원지역에 명성산성과 동주산성과 같은 궁예의 산성유적이 존재하는 것을 봐서 짐작컨대 저 호위무사들 어딘가에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도 따로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통일이 되어야 풀리는 퍼즐일 뿐...
나는 궁예도성이 조선왕조 한양도성의 왕궁 축조 논의의 선례이자 원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편에 진산을 두는 도시의 역사가 조선왕조에도 계속 논의되었기때문이다. 애초에 무학대사가 왕궁 자리를 정할 때 정도전과 달리 서쪽 인왕산을 배후 진산으로 삼으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발상이었다. 궁예도성은 왕도의 정기가 충만한 땅으로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이어지는 한국 도시디자인과 땅의 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연결점이다.
옛 도시의 흔적을 직접 걸어들어가 보지 못하는 분단의 현실이 하루밤 자고 일어난 오늘까지도 깊이 사무친다.
ⓒ 김민수,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