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01.16. 월
쾌청한 날씨에 강연 겸 부여 여행.
오래전에 약속한 강연을 위해 부여 전통문화대학교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해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갈아타고 2시간만에 부여 나들목을 빠져 나왔다. 그새 부여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전통문화대학교 주변에는 롯데아울렛-리조트와 연계해 드라마 세트장 같은 백제문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롯데가 찜한 땅은 황금알을 낳는다. 롯데는 전국 주요도시에 일제강점기 부산부청(현 롯데월드)과 대구역(현 롯데백화점/대구역사)처럼 식민통치의 거점이거나 대한제국이 선포된 서울의 원구단(현 조선호텔)과 황궁우 일대(현 롯데백화점/롯데호텔)처럼 주요 혈자리만 골라서 부동산개발을 하기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수익은 일본으로 챙겨간다. 과거 일제가 했던 자본주의 수탈방법이 무늬만 바뀌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백제문화단지를 삐끼로 내세운 롯데아울렛과 리조트는 인근 공주와 세종시는 물론 멀리 대전 일대 충청권의 쇼핑-문화관광지로 알려져 주말이면 붐빈다고 한다. 옛백제의 중심권을 롯데의 이력과 자본력이 삼켜버린 것이다. 도착해 보니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가 영하의 날씨에 유치한 캐릭터와 조형물의 영혼없는 마중과 인적 없는 냉기만 감돌고 있었다.
아울렛은 백제식 건축양식을 사용해 나름 공들인 모습이다. 허나 전체적으로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과거과 현재를 병치한 절충주의. 백제의 마지막 왕도 부여의 장소성이 그나마 급조된 키치스러움을 경감시켜 견딜만하다. 길건너 맞은편의 리조트 건축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화학적 결합을 위한 고민이 보여 한결 나아 보인다. 그러나 아울렛 입구의 캐릭터 디자인과 조형물이 제발등을 찍고 있다. 한국의 지자체 디자인 수준은 늘 문제적이다. 조잡하고 유치한...백제의 우아하고 섬세한 미학적 정체성을 알기나 하는가.
ⓒ 김민수
롯데아울렛에서 점심식사하고 1시부터 대학 내 전통문화교육원에서 '한국도시디자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강연. 예정된 2시간 30분의 시간을 내친김에 15분 초과해 마무리하고...
강연 마치고 다시 가보고 싶던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6세기에 축조된 부소산성은 부소산 남사면 자락에 평산성의 형태로 사비도성(현 관북리유적지 일대)을 두고, 배후에 전시에 대비해 또 다른 방어용 성을 축조한 백제의 전형적인 전술산성으로 여겨진다. 오르는 길 구릉지에 부여 객사, 동헌, 내아와 옛부여박물관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현재 박물관을 이전하고 부여문화재사업소가 들어선 이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한 것으로 1967년에 준공, 1970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그동안 '한국전통의 내재미와 형식미를 추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말과 달리 흰색의 건물에서는 일본 전통극 '가부키와 노' 공연에 등장하는 얼굴을 하얗게 미백분칠한 배우처럼 극화된 냄새와 사무라이 무장의 갑옷과 투구의 형식미가 진동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의 도쿄 요요기 경기장(1964)을 모방한 것이었다. 요요기 경기장은 지붕을 케이블로 연결한 혁신 공학의 건조공법을 일본 신사 건축의 전통과 절묘히 결합한 결과였다. 반면에 김수근의 그것은 겐조 건축의 이미지 위에 부분 디테일을 한국 전통문양으로 입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이후 진행된 빈껍데기뿐인 형식미로 점철된 이른바 '한국적 디자인'의 형식주의적 태도와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출발점이 되었다.
부여 객사와 동헌 등 고건축이 자리잡고 있는 역사적 장소와 경관에 일본 신사풍의 박물관을 꼽아놓은 김수근의 끔찍한 발상은 과거 민주주의를 고문치사로 압살한 남영동 대공분실(1976)도 설계한 어둠의 행적과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공적도 크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 그동안 동업자 정신으로 똘똘뭉쳐 침묵해 온 건축계는 반성해야 한다. 칠이 벗겨지고 퇴락한 건물을 보면서 일신의 영달을 위해선 불의와 권력의 하수인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한국 건축계와 디자인계의 우울한 초상이 스쳐 지나간다.
낙화암과 고란사 가는 길은 한겨울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고즈넉하고.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의자왕과 나당 연합군에 폐망한 백제. 이를 욕보이고 합리화하기 위해 누군가 조작한 '삼천궁녀 투신설'을 새겨놓은 낙화암은 왜곡된 '썰'과 무심하게 오후 석양에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적대적 권력은 비경의 정취마저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식의 왜곡이 생태건축가 정기용이 생전에 정성을 다해 디자인한 고 노무현대통령의 소박한 봉하 사저마저도 아방궁이라 한 능욕의 역사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변한게 없다. 역사는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낙화암 아래 가파른 절벽을 구비구비 돌아 고란사로 가는 길은 예전에 왔을 때 보다 힘들게 느껴진다. 그새 늙었는지. 부소산성 북사면에 위치해 그늘진 이곳엔 아직 눈이 쌓여 있어 겨울 정취에 흠뻑 젖어들게 한다. 고란사 뒤편 샘터에서 한잔에 십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의 약수를 욕심을 버리고 딱 한잔만 마시고...
엄동설한 오후에 오른 부소산성, 모처럼 조용하게 역사와의 만남과 사색이 좋았다.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