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土_getto 2018. 1. 2. 20:16

01.02.화.

 

파주 한국영상자료원에 갔다가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1987>을 봤다.

어렵게 이룬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이로부터 30년 후 촛불혁명. 이 모두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인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진 한국현대사의 순간들이다. 특히 영화 <1987>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는데 공헌한 공안검사 최환, 황적준 부검의,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와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 한병용 교도관 등... 이들 모두가 상황과 경우가 어쨌든 일말의 양심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016년말에 양심에 이끌려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거리로 나와 대통령 탄핵과 관련자 처벌을 외쳤다.

 

한국 사회가 이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기적과 같은 이들의 작은 양심들때문이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열사 최류탄사망사건이 이제야 제대로 조명을 받아 다행스럽다. 2015년에 <한국현대사와 민주주의> 책 표지 만들면서 서울대 중앙도서관 앞에 세운 박종철 열사상을 주제로 가급적 디자인을 최소화하려했었다. 박종철 사건에 대한 조명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현실에서 그 팩트를 디자인으로 윤색해 희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열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일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부당한 독재정권 유지에 부역하고, 때론 제대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지도 않은 역사적 기억을 지우는 하수인 역할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보란듯이 버젓이' 해왔다. 그들은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불의에 타협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컨대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 1987년 민주화의 염원을 냉각시키고 정신을 딴 곳으로 돌려막는데 기여한 1988서울올림픽. 그리고 금남로와 구전남도청사를 박제화시켜 5.18의 기억을 말살시킨 광주아시아문화전당 건립 등.. 이처럼 건축과 디자인의 이름으로 부당한 정권의 충직한 시종 역할을 하면서 영화 속 대공수사관처럼 알아서 '받들겠습니다!'한 자들은 이외에도 많다.

 

박종철 고문치사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 실내 장면에서 같은 시기(1976) 김수근이 함께 설계한 서울대 미대 건물 내부에 나의 옛연구실(52동413호)의 똑같이 좁고 길쭉한 창이 생각나 피가 다시 거꾸로 솟는다.

 

영화는 노래 '그날이 오면'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의 부제가 바로 '그날이 오면'(When the Day Comes)... 그러나 과연 현재 그날이 왔는지 모르겠다. 엔딩크레딧 자막이 올라가며 옆자리에서 일어나던 관람객이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어..." 그렇다. 추악한 잔재가 아직도 곳곳에 차고 넘칠만큼 남아 있다. 이 잔재들을 구석구석 철저히 청산하지 않는 한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 또 다시 그런 날이 온다면....생각하기도 싫다. 이제 끝내야 한다.

 

 

 

 

 

 

 

         (위/아래: 메인&티저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

 

 

                                                                  ⓒ 김민수

 

                                        (김수근, 남영동 대공분실 (1976), 사진출전: 경향신문)

  

 

                                              ( 영화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치사 현장 장면 / ⓒ CJ 엔터테인먼트 )

 

김수근의 남영동 대공분실의 세로로 좁고 길쭉한 창문은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건물 창문과 같은 형태다. 그는 1976년 대공분실 건축에서 인간이 공포를 극대로 느끼는 공간을 설계했다. 역설적인 것은 그가 같은 시기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세운 폐쇄적이고 미로같은 '50-51-52동 미술대학' 건물을 설계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옛날 부임해(1994) 해직되어 복직 때까지(1998~2005) 사용했던 나의 옛연구실이 52동 4층 서편 복도 끝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연구실의 감옥과 같은 창을 늘 부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김민수

 

1998년 부당해직되고 연구실을 사수하던 시절의 폐허가 되어버린 미술대학 52동 413호 나의 연구실. 연구실에 유일하게 뚫려 있는 멀리 오른쪽의 길쭉하고 좁은 창문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창과 동일한 디자인이다. 욕조와 변기만 없을 뿐 방의 가로 폭도 거의 같다. 비례로 볼 때 대공분실 창 너비는 미대 연구실 창 보다도 더 좁아 절반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김수근의 건축은 인간을 공간에 가두고 통제하며, 겨우 숨쉬고 연명할 수 있는 콧구멍과 같은 좁은 창문만을 허용했다. 이런 그의 건축을 일컬어 '모태 공간'이니 뭐니 하는 수사로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로 '받들어온' 것이 우리의 비극적이고 유감스런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