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디자인과 현대미술 사이--국립현대미술관 2014.10.31

開土_getto 2014. 11. 20. 10: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사물학-디자인과 예술, 2014.6.5~2015.1.11>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 관련 부대행사로 열린 '디자인과 현대미술 토크' 세미나에서 초청 강연을 하고 왔다.

 

 

 ⓒ 김민수,2014.  

            강연 장소가 전시장 안에 마련되어 강연 도중에 전시품을 직접 손으로 지적하며 말할 수 있어 좋았다.

 

 

ⓒ 김민수,2014

                청중들에게 이 의자를 가르키며 물었다.

                "마치 '손대지 마세요'가 작품 제목 같습니다.  과연 이 가학적 의자는 디자인일까요?"

      

 

(다음은 강연문을 축약한 것임 )

 

 

 자인과 현대미술 사이

                                             

<사물학-디자인과 예술, 2014.6.5~2015.1.11> 전시 관련

'디자인과 현대미술 Talk' 세미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4.10.31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대학원 디자인역사문화 전공주임

 

I.

앞으로 나올 『한국 현대디자인 역사』에서 2013년은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사료적 가치가 있는 다른 사건들도 있지만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디자인 상설전시실’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첫 번째 기획 전시 《디자인: 또 다른 언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사물학-디자인과 예술》전이 열리고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디자인의 가치를 단순히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경영전략으로 인식해온 산업적 차원을 넘어서 문화적 가치로 인식의 전환을 주장해 온 필자에겐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디자인은 한 사회의 일상 삶과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진맥점이며, 디자인 행위는 단순히 의도된 공간, 사물, 이미지를 ‘계획하는 일’을 넘어서 일상 삶을 약속하는 사회문화적 상징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일이다.1

       1) 졸저, 『21세기 디자인문화탐사: 디자인, 문화, 상징의 변증법』 (1997, 솔 초판 /  2016, 그린비 개정판).

 

국립현대미술관의 디자인을 위한 ‘상설전시'2 공간의 제도화는 매우 뜻 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999년 예술의전당에 ‘디자인미술관’의 개관과 같은 선례도 있었다. 당시 문화관광부는 ‘문화의 시대’를 맞아 문화산업진흥법을 제정해 예술경영에 디자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문화예술을 기초로 한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국민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산업계에 디자인의 정보화와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위해 디자인미술관을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 마련된 전시실은 앞서 디자인미술관과는 그 위상과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예술의 범주에서 디자인과 미술 사이의 관계방식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2)  ‘상설 전시’의 일반적 의미는 일시적으로 개최되는 기획전시와달리 ‘장기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전시 형태를 뜻한다. 그러나 국            

               립현대미술관은 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디자인이 예술로 인식되고 미술관 전시가 빈번해질 때 그 본질과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짚어보기 위해 다음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과연 디자인은 예술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성격의 예술인가? 디자인이 예술일 경우, 같은 위상의 하위 개념으로서 디자인과 현대미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2.

첫 번째 질문에 결론부터 말하면, ‘만화’가 ‘TV와 영화’에 이어 ‘제 9의 예술’로 인정되는 현 시점에서 디자인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철지난 논쟁거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오늘날 예술의 지향점은 과거 특권적 소수만 향유하던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대중적인 생동감과 현실을 반영한 이른바 ‘삶과 같은 예술’(life-like Arts)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만화 보다 더 일상적인 ‘생활 예술’로서 앞으로 그 자체가 ‘제 10의 예술’로 공표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각-시간-공간 예술의 공통점은 단순히 미적 형식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공통점은 추상적 개념인 ‘아름다움’ 보다는 일종의 ‘쾌감’에 가까운 ‘감동’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편이 적절할지 모른다.

 

디자인의 경우 미적 쾌감으로서 감동은 미술처럼 단순히 디자이너가 의도한 공간, 사물, 이미지의 형태, 색, 질감 등과 같은 시각적 조형 요소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디자인은 사용성과 관련된 물리적 기능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사용자 개인이나 집단의 시각을 넘어서 오감을 아우르는 심미적 감각과 총체적으로 부합될 때만이 유발되는 마음의(심리적인)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생산된 스마트폰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있어 직관적 조작력과 교감력이 뛰어나 사용자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예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옷이 거리에서 입고 활보할 수 있을 만큼 신체성과 활동성을 전제한 새로운 패션으로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굳이 입지도 못하는 설치 미술을 흉내 내지 않아도 그 자체가 삶을 위한 ‘제 10의 예술’인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인간 삶에 감동을 주고 사회문화적으로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모든 예술의 공통점을 지녔지만 감동의 생성과 소통 방식에서 다른 예술과 구별된다. 이런 맥락에서 디자인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말 속에는 고전적 예술개념의 만들어진 전통으로부터 이어져온 편견이 전제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디자인 운동은 근대 미술의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엄밀히 말해 20세기 초 근대 미술은 건축과 디자인이 형성시킨 근대 도시의 가로경관이 인간 마음의 생태계를 교란시켜 촉발시킨 현상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즉 근대 미술은 일부 아방가르드 화가와 조각가들에 의해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 구축된 근대 도시 속에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한 각종 디자인의 출현에 의해 조장된 것으로, 예술가 개인의 구체적인 생활감각과 실천이 생성되고 틀 지워진 사회적 조건, 곧 아비투스(habitus)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예컨대 레제, 브라크, 피카소, 뒤샹, 에른스트, 마그리트, 로드쳉코 등의 미술가들은 도시의 가로경관, 신문, 광고, 빌보드 간판, 만화, 카달로그와 같은 대중 매체와 디자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근대 미술의 실험을 감행했다. 또한 독일의 교육기관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조각 같은 미술은 건축을 중심으로 디자인, 곧 타이포그라피, 그래픽, 제품 등을 ‘총체예술’ 차원에서 통합함으로써 기계생산과 결부된 ‘산업 미학’을 탄생시켰다. 바우하우스에 교수진으로 참여했던 칸딘스키와 클레 등과 같은 추상 미술의 원조들이 지니고 있었던 예술적 표명은 바로 이러한 산업 미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 미술은 애초에 근대 디자인이 형성시킨 삶의 경관으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미학적으로는 똑같은 동전의 양면처럼 디자인과 동일한 심미적 조건을 공유하면서 탄생했던 것이다.

 

20세기 디자인과 미술 사이의 미학적 공유는 1929년 설립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탄생과 전개 과정이 방증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개관 시점에서부터 회화와 조각의 미술뿐만 아니라 기계 생산된 생활용품과 포스터, 타이포그래피 등의 디자인을 함께 전시했다. 당시 미술사가인 초대관장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 1902~1981)는 미술품과 동일하게 디자인된 기계생산품과 건축3을 함께 기획 전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34년 '기계 미술'(Machine Art) 전시회는 당대에 기계생산된 생활용품들의 미적 가치를 회화와 조각품의 그것과 동일한 것임을 소개하고 있었떤 것이다. 이러한 현대미술관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전시실에 자동차와 헬리콥터 및 각종 제품디자인이 순 미술품과 똑같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3) 알프레드 바와 헨리-러셀 히치코크가 기획한 전시로 1932년에 <Modern Architecture: International Exhibition, 1932>.      

              (1932,2.10~3.23)이 열렸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디자인과 미술의 관계는 한편에서 디자인이 현대미술관 등에서 미술품과 같이 심미적 대상으로 전시되는 현실과 무관하게 분리해 인식되었다. 점차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 생산과 소비문화가 본격화되면서 디자인은 판매촉진을 위한 기업전략과 방법론이 중시되는 대중적 서비스 개념으로 점차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보다 앞서 1920년대 말 대공황 시기에 미국의 대기업들은 경영 타개를 위해 재능 있는 삽화가와 무대미술가 등을 구원투수로 등판시켜 최초로 ‘산업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디자인은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산업전략 내지는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60년대 한국의 디자인이 대통령이 하사한 한 점의 휘호 ‘미술 수출’을 기치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4를 개최하고 디자인포장센터(현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의 전신인 공예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정부 차원에서 진흥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4) 이는 1966년 제1회 전람회를 시작으로 제11회까지 상공부가 주관했고, 제12회부터 41회까지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로 개      

               칭하고,  제42회부터 '대한민국 디자인전람회'로 명칭이 바뀌어 2014년 현재 제49회 전람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매년 개최된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는 공산품의 고부가가치를 높여 산업 경쟁력의 촉매 역할을 하는데 목적을 두었지만 실제 내용은 ‘미술로 포장된 빈껍데기’의 경합장에 불과했다. 선정된 수상작들은 현대적 형식성에 집착했지만 내용적으로 실제 산업 생산으로 이어져 일상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또한 이러한 관제 전람회 제도에 대해 많은 미술대학 등에서는 수상을 목표로 교과과정을 운영할 만큼 긴밀히 연관되었다. 이렇게 배출된 소위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사회-문화-역사적 접점을 찾으려는 의식은 별로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고상하지만 배고픈 미술가가 되기보다는 다만 돈 버는 수단으로서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의 디자인은 내용적으로 전제해야할 최소한의 사회철학은 물론 이 땅에 펼쳐져 온 인간 삶의 역사문화적 연속성에 대한 성찰적 사고 없이 현대적 조형미에만 목숨을 거는 형식주의 ‘상품 치장술’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2000년대 ‘문화의 시대’를 맞아 새롭게 포장된 문화적 풍경을 펼쳐놓았다. 지난 1990년대 디자인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재고되면서 정부는 1999년 ‘7대 문화산업 육성계획안’을 발표하고 기존 문예진흥원 자리의 미술회관을 ‘디자인미술관’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술계의 심한 반발로 무산되고 정부는 계획을 변경해 예술의 전당에 미술관을 마련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디자인미술관’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디자인미술관이라는 공간에 포함된 ‘예술, 디자인, 미술관’의 관계방식에 대한 개념 정립은 물론 공론화 단계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디자인미술관의 전시는 때로 의미 있는 주제의 기획도 있었지만 실제 내용에서 대부분 기존 미술 전시와 별 차이가 없이 피상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기획하기 복잡하고 어려우면 외국 디자이너 작품 소개에 의존하거나, 때론 디자인과 상관도 없는 전시들이 디자인으로 포장되어 눈요깃감 차원에서 채워지기도 한다.  

 

 

3.

일찍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은 서로 다른 차이를 지니면서도 ‘다양한 유사성이 겹치고 교차하는’ 관계방식을 ‘가족유사성’의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형제들 사이의 가족유사성은 스포츠 경기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 중에는 농구와 축구 등의 수많은 종목들이 존재한다. 이들 모두는 같은 스포츠이면서 서로 다른 경기방식, 즉 지켜야할 ‘룰’이 다르다. 축구는 공을 손으로 잡으면 반칙이 부과되지만 농구는 손으로만 경기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미술 형식과 같거나 유사한 감동을 자아내는 유사성을 공유하지만 존재 방식과 소통에 있어 지켜야할 ‘룰’이 다른 또 다른 언어의 예술인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에서 디자인이 기획 전시되더라도 그 내용과 형식은 당연히 미술과 구별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디자인 전시는 내용에 있어 실생활과 내밀한 접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간, 사물, 이미지를 둘러싼 실제 삶의 현실을 성찰해 문화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미술관에서 전시되기 때문에 디자인이 일상성으로부터 탈구되어 박제화 된 고상한 미술품처럼 또는 눈요기 차원에서 전시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형식에 있어서도 디자인 전시는 기존의 미술 전시와 달리 구체적이고 다중적인 입체적 교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포스터와 같이 고전적인 2차원 평면 매체가 아니라 책, 가구, 제품, 옷 등과 관련된 전시라면 사용성, 신체성, 착용성과 관련해 내밀한 교감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상설전시실의 첫 번째 기획전시 <디자인: 또 다른 언어> 전은 좋은 예증 사례를 남겼다. 이 전시의 기획 의도는 “2013년 국제 디자인계가 가장 주목하는 우리나라 동시대 디자이너 10인이 참여하여 모두 새로운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동시대 디자인 분야가 실험하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전시는 이들 디자이너들이 “오랜 시간 공유해 왔던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표현 체계를 또 다른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기획 자체는 디자인이 미술 등의 여타 시각예술의 형식들로부터 확실히 구분되는 ‘또 다른 언어’이자 예술임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름으로 표명할 수 있는 시도라는 점에서 훌륭했다. 이 중에 일부 작품에서는 현대디자인의 상황과 역사를 성찰하게끔 하는 미학적 표명과 밀도감도 반영되었다. 예컨대 티세트 <침묵하는 기계#02>는 한낱 무가치한 오브제로 여겨질 수 있는 기계부품에 향수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오래된 기계미학(Machine Aesthetics)에 현재성을 부여했다. 이는 한쪽 벽면에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상영하고 중앙의 긴 테이블에 티세트와 기계부품들을 진열하고 맞은편 벽면에 복고풍의 전단지를 붙여놓음으로써 마치 기계부품들이 새 생명을 부여받아 과거에서 현대로 혹은 현대에서 과거로 시간을 하는 상황을 제공했다. 이 작품의 경우 티세트 본래의 기능적 형태가 유래한 미학적 기원에 대한 탐구와 방법론을 함께 제시했다는 점에서 디자인이 미술과 다른 ‘또 다른 언어’임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시 작품들 중에는 “쇼핑카트가 쇼핑카트가 아니고 가구 역시 더 이상 가구가 아닌” 작품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 필자와 같은 평범한 관람객들은 과연 제시하는 새로운 언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감을 잡기 어렵다. 전시 설명문을 보면 “다른 언어로의 이행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관람객들의 참여를 유도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디자인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행되는 난해함을 관람객들에게 풀어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 이미 디자인이 아님을 의미한다. 디자인의 언어는 체험과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 상설전시실 신설 목적이 디자인 자체의 미학적/언어적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대미술과 뒤섞어 다만 구경하는데 있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디자인의 소통은 전시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과 과정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디자인 전시가 소통되는 경로를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으로 제한할 순 없다. 그것은 관람객이 만지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체험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적인 미술 전시에서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품 보호와 관리 차원의 문제가 따르겠지만 디자인의 기능과 사용성에 대한 최소한의 접근성이 마련되어야할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디자인 자체가 과거의 보는 경험으로부터 조작과 체험으로서 시각문화를 확장시키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술변화와 혁신에 민감한 디자인에 있어 새로운 기술을 해석해 제시하는 경우, 그것의 존재 방식과 함께 작동 과정을 소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예컨대 3D 프린팅 기술의 출현으로 제작공정이 단순 신속해지고, 소량 주문생산이 가능해진 요즘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디자이너와 인공물의 존재론적 의미 및 미학적 이슈 등은 실재를 소통하기 전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4.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상설전시실의 설치로 앞으로 미술관에서 디자인 전시가 더욱 빈번해 질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제 ‘디자인과 현대미술’ 사이의 구분은 공간, 사물, 이미지 자체의 본질적 성격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통되는 맥락이 일상 삶의 문맥인가 아니면 미술관과 같은 특정 장소인가의 차이점 밖에 없을지도 모를 만큼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디자인과 현대미술의 위상이 서로 뒤바뀌는 일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이 미술관의 미술로 향해가는 반면 현대미술이 ‘미술관 미술’로부터 디자인으로 향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양자 사이에 위상 치환이 발생한다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설사 현대미술이 디자인으로 맞바꿔 ‘스와핑’(swapping)하더라도 디자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과의례와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개인과 집단의 일상 삶을 가능케 하는 수많은 사회문화적 상징들을 해석하고 창조해 소통시키는 디자인 본연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고 이 과정을 묵묵히 감내하겠다고 세상과 약속하는 일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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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짜> 전편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는게 예술이다...화투도 예술이다"

 

고로 디자인은 예술이 되고자 따로 억지로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이기때문이다.

 

모든 인간 활동은 본질에 충실해 삶의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예술이 된다.

 

부디 앞으로 미술관에서 다뤄질 디자인 전시는 기존 미술을 흉내낸 자위적이고 자기탐닉적인 것이 아니길 빈다.

'바로 여기'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삶의 문제를  진솔하게 다뤄 역사, 정치-경제, 사회-문화, 과학-기술 및 환경문제 등과의 내밀한 접점을 보여줘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