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 토.
서울대민주둥문회와 총학생회가 함께 마련한 행사에서 인사말을 부탁받아 다녀왔다.
<제5회 서울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
인사말을 요청받고 며칠전 총장후보로 선정된 5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내 이런 행사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참석해 주시라"고 썼다.
그러자 행사장에 4명의 후보가 참석했다.
인사말 연설에서 후보들에게 부탁했다. 누가 총장이 되시더라도 대학의 참다운 역사와 전통을
일부 소수의 행사가 아니라 범서울대인이 기리고 함께 하는 행사로 정착시켜달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민주화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 희생자가 무려 서른 네분이나 된다.
그러나 서울대는 이분들이 목숨과 맞바꿈 대학의 역사를 제대로 기리지도 기억하지 않았다.
이 결과, 국정농단/사법농단/경제농단의 주역들처럼 다만 그릇된 기득권 양성의 요람이 되어 버렸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행사 내용 중에는 열사들의 생애와 마지막 몸던지는 순간을 누군가 포착한 영상물 상영도 있었다.
총장후보들 각자 나름대로 대학의 역사와 정신에 대해 뭔가 느꼈을거라 여긴다.
이번 총장선거가 서울대 변화의 변곡점이길 기원한다.
<제5회 서울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합동추모제>
인 사 말
반갑습니다.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의장 김민수입니다.
먼저 ‘서울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합동추모’ 행사를 준비하신 서울대 민주동문회와 제60대 총학생회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뜻깊은 이 자리에 초대받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인사말을 제 소감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저는 미대 디자인학부에서 디자인역사와 비평을 가르치면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우리의 동문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를 당하고, 故 김근태 동문을 비롯해 많은 동문들이 고문당한 가슴 아픈 장소입니다. 저는 박종철 열사가 목숨을 잃은 고문실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영화 속 고문치사 장면이 떠올라서이기도 하고, 과거 제가 근무했던 미대 연구실 공간에 얽힌 제 트라우마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공분실 건물과 미대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1976년 같은 해에 준공되어, 많은 부분에서 닮은꼴을 하고 있습니다. 대공분실 디자인은 창이 좁고 폐쇄적이며, 곳곳에 심리적 압박감을 철저히 계산한 매우 사악한 건물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대공분실 고문실과 유사한 형태의 연구실에서 1994년부터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재임용심사에서 미대 초기 교수진의 친일행적과 교과과정의 문제를 지적한 괘씸죄로 부당해직되었습니다. 2005년 6년 반만에 법원 승소판결로 원직 복직해 지금은 다른 건물 연구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공분실의 고문실을 본 순간 과거 트라우마가 떠올라 힘들었습니다. 저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현장에서 제가 지냈던 미대 연구실뿐만 아니라 서울대 캠퍼스의 공간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거 우리 동문 열사/희생자들이 죽음으로 쓴‘정의로운 역사'를 과연 현재 서울대가 어떻게 기억하고 함께하고 있는 가입니다. 물론 학내에서 이러한 숭고한 전통을 잇고자 한 노력은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왔습니다. 교정에 흩어져있는 동문 열사/희생자들의 기념비들을 연결해‘민주화의 길'을 조성하고, 학생운동사를 정리하고, 매년 민주동문회가 추모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서울대 전체로 볼 때 낯설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서울대의 학풍 내지는 학문적 정체성이 갈수록 동문 열사/희생자들의 정신과 멀어져 가는 데서 오는 공허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오늘 추모제가 서울대의 정신과 학문적 정체성을 묻고 회복하는 성찰적 움직임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침 총장 재선출 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비 후보들께서는 다양한 공약을 대학발전 방안으로 내걸고 계십니다. 나름의 고심이 담긴 생각이시겠지요. 그러나 이에 앞서 이번 추모제에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듯이, 시대의 불의에 저항했던 동문들의 정신을 서울대의 학문 정체성으로 잇는 공약들도 함께 논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실은 제가 며칠 전 후보 다섯 분께 오늘 행사에 참석해 주십사하고 편지를 드렸습니다. 이에 네 분께서 흔쾌히 참석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기왕에 참석해 주셨으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앞에서 약속 하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분께서 총장이 되시더라도 오늘 이 행사를 일부 소수만의 주변부 행사가 아니라 개교기념일에 버금가는 범서울대인의 행사로 자리매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 추모제를 전 서울대인이 기리고 본받을 수 있는 중요한 행사로 추진해주셨으면 합니다. 기꺼이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서울대의 정신이 소생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조만간 우리 민교협에서는 후보님들께 공개 질의서를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최근 우리의 동문들이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인권기념관으로 거듭나 시민사회의 품으로 되돌려졌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이 추모제의 기본 정신과 휼륭한 역사를 되새겨 서울대가 더 이상 ‘그릇된 기득권’ 배양의 온상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민주사회를 위한 교육과 연구의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 11. 3
의장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