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로고
(출처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평창동계올림픽의 검은 그림자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수십조의 국민세금을 퍼붓고도 개최후 빚더미만 남게될게 뻔한 속앓이는 일단 접어두자. 단 며칠 동안의 행사를 위해 오백여년 이어온 가리왕산 산림훼손 건설비로 1천100억원 쓰고, 다시 복원하는데 1천억원을 쓰겠다고 한다. 어떻게 500년을 복원들 하시려고.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웜홀을 통과할 '미래 한국인'을 우주로 보내서?
며칠 전 IOC는 개최지 재정부담을 줄이는 자구책으로 분산개최 허용안을 결의하고 평창조직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 도시들이 큰돈먹는 하마이자 빚더미 행사로 전락해버린 올림픽을 개최하기가 사실상 힘들어졌기때문이다. 허나 대통령까지 나서 SOC 사업과 경기장 공사에 막대한 예산을 평창에 집중하려던 조직위로선 거슬리는 제안일테고...
오늘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으로 '애비로서 국민에게 용서를 바란다'고 누군가 써준 원고 지문대로 허리 구부려 쇼하며 빌었다. 세계 언론이 대한항공 보다 고려항공이 낫겠다고 비아냥거리는 판에 누가 한국 국적기 타고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할지 궁금하다.
한데 평창동계올림픽의 그림자는 로고디자인에도 드리워져 있다. 유치원 애들 수수깡 놀이처럼 천진난만한 이 디자인은 '의미 소통과 요소 디자인'의 두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만일 올림픽이 전 세계인이 함께하는 국제행사가 맞다면, 로고는 보다 보편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디자인되었어야 했다.조직위원회가 말하듯 세계인이 평창 로고디자인의 'ㅍ'과 'ㅊ'을 '평창'으로 읽을 가능성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만일 이 로고가 한국에서 열리는 타이포비엔날레(타이포잔치)와 같은 전문적인 타이포그라피 국제행사를 위한 것이라면 말은 된다.
타이포비엔날레의 로고 디자인은 조선시대 주자소에서 찍어낸 자모틀에 기초해 행사의 전문성을 잘 담아냈다. 그러나 평창동계올림픽은 타이포잔치처럼 활자를 자랑하기 위한 국제행사가 아니지 않은가.
국제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
(http://typojanchi.org/2013/kr/#contents)
평창 로고디자인의 또 다른 문제는 각 요소들의 세부 디자인에 있다. 우리 인간의 눈은 선택적이다.
아쉽게도 평창 로고디자인은 우리의 눈이 한번에 많은 정보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는 기본을 고려하지 않았다. 새로움이란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 위에 이전과는 다른 감동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역대 올림픽 로고들을 보자. 로고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에서 무엇이 먼저 눈에 지각되어야하는지 요소들의 우선순위를 층화시켜 조절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평창 로고는 각 요소들('ㅍㅊ', 'PyeongChang 2018', 오륜심벌) 사이의 시각적 차이가 별로 없어 시선의 초점이 잡히질 않는다.
평창 로고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 요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말많은 'UX와 UI'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용자 경험, 곧 'UX'는 인지적 교감영역에서 발생한다. 쉽게 말해 그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과연 마음 속의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선 UX가 UI의 과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경험'이라는 것은 내용적 개념이지 지각 가능한 형식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라는 개념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바로 이것이 사용자 인터페이스, 즉 UI인 셈이다. 역으로 UI라는 형식을 채우는 내용적 개념이 UX라 할 수 있다. 'UX와 UI'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별개로 보면 평창 로고디자인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예컨대 로고의 요소인 'ㅍ'과 'ㅊ'이 평창을 의미한다는 조직위의 설명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용자 경험의 세계에서만 소통될 뿐이다. 소통은 의미를 서로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평창동계올림픽 로고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을 저버린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류의 흐름를 타고 자신있게 한글꼴로 올림픽 로고를 세계에 천명하려했던 의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별 요소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의미 전달에 있어서 기본이 무시되었다. 무엇보다 평창동계올림픽은 한글 'ㅍ,ㅊ'의 조형성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도시 '평창'을 세계에 인지시켰어야 마땅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기본과 원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신뢰가 사라진 사회가 되어 버렸다. 죽은 적이 없는 강을 살린다고 멀쩡한 강을 죽인 '사대강 살리기'와 어이상실 로봇 물고기, 무책임한 세월호 참사, 롯데제2월드와 잠실 씽크홀 악몽과 부실시공이 초래할 공포 등...
'땅콩회항' 사건으로 용서를 빌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냥 시늉만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시늉만 하고 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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