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로 교보빌딩 사거리 지나다 보면 일명 '땡땡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어반 하이브'(2008). 이는 마치 구멍이 송송 뚫린 거대한 치즈 덩어리처럼 혹은 건물 전체를 타공판으로 마감한 듯 수많은 구멍들로 눈길을 끈다.
어떤 건축 평론가는 이 건물이 대각선 방향에 마주한 마리오 보타의 <교보타워>에 대해 "의식의 차원을 넘어 맞짱 한 판 제대로 뜰 생각"의 대결구도를 자아낸다고 했다. 그는 하얀 콘크리트의 <어반 하이브>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정신의 산물이라면, <교보타워>는 분절된 여러 덩어리들로 구성된 온몸을 치장한 덩어리, 곧 재료와 디자인의 산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러한 비평에 한편으로 의아한 것은 둘 모두 디자인의 산물인데 왜 <어반 하이브>를 '정신의 산물'이f라 하고, 반면 <교보타워>를 '재료와 디자인의 산물'이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은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도 이는 평소 디자인을 비본질적인 장식적 치장술로 여기는 세간 상식의 소산인 듯 싶다. 해서 그는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 대립항으로 보고, 본질적인 건축에대해 비본질적인 장식 차원에서 디자인을 위계적으로 건축보다 저급한 것으로 본 듯하다. 허나 세상엔 디자인만큼이나 허접한 건축도 많다. 그것은 디자인의 철학과 방법론적 차이의 문제이지 건축과 디자인 사이의 본질적 속성의 차이는 아니다. 또한 프로세스적으로도 건축이 디자인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건축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어반 하이브>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콘크리트 구멍들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그 자체로 건물을 지탱하는 가구(架構) 구조이면서 자연과 인공, 두 가지 빛으로 건물의 존재적 서사를 말하고 있다. 낮에 햇빛은 건물 내부에 수많은 동그라미 음영을 투영시키고, 밤에 내부 조명은 밖으로 구멍의 실루엣을 발산해 건물의 무게감을 극적으로 상쇄시킨다.
한데 이 수많은 구멍들을 통해 안에서 바깥을 보는 입주자의 시선은 어떤가? 생각만큼 낭만적이거나 '동화 같은 풍경'은 아닐 수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 4: 구원>이 생각난다.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매우 강렬한 타공판 구멍 이미지를 보면서 <어반 하이브>의 문화적 경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오늘날 구조물에 있어 타공판에 뚫린 구멍 이미지는 과거 선박 등에 사용했던 원형 창의 순진무구한 낭만성을 넘어서 사이버펑크적인 암울한 근미래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다. <터미네이터 4>에는 영화 속 주인공 존 코너의 미래 아버지인 카일 리스가 스카이넷의 전함에 포로로 타공판 철창에 갇혀 이송되는 장면이 나온다. 한데 이때 카일 리스와 타공판 구멍이미지의 관계는 '절망 또는 갇혀진 희망'이다. 이 영화는 부제가 말하듯, '구원'(salvation)을 기다리는 '절망적 상황'의 미장센을 위해 타공판 이미지를 프레임과 아이콘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어반 하이브>의 구멍들은 어쩌면 한국 건축이 '강남 자본대로'에서 견디기 위한 실존적 필요에 의해 극화된 이미지의 스테로이드 처방을 받은 것으로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를 두고 기존의 도시건축이 지닌 "시선의 권력을 내장하거나 세상을 날 것으로 대면시키는 불안을 야기하는 커튼 월도 아닌... 동화 같은 풍경으로 시선이 동반하는 권력구조를 폐기한다"는 식의 건축 비평은 오늘날 한국 도시가 처한 현실 문제의 최전방 교전 상황과 함께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좀 더 사회문화적으로 내밀하고 치열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 김민수, 2015
사진출전: 아르키움 http://www.archiu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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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네이터 4>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