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6. 토.
병신년 음력 새해맞이 겸 홀로 관악산에 올랐다. 비록 학교 뒷산이지만 관악산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산행에 더없이 훌륭한 명산이다. '관악'을 순우리말로 풀면 '갓뫼' 곧 갓을 쓴 산이다. 그러나 관악산의 형상은 본래의 '갓관'(冠)자적 모습 보다 활활 타오르는 '불화'(火)자의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내에서 본 관악산의 자태> ⓒ 김민수
예컨대 속설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풍수적 이유로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시대 해태상의 원위치가 현재와 같은 광화문 바로 앞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본래 사헌부 앞(현 세종문화회관 앞쯤) 육조거리 양쪽에 세워져 있었다. 이는 해태상이 관악산의 화기 제압이라는 풍수적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위치적 장소성을 고려할 때 사헌부와 관계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상징성이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해준다. 해태는 원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전설의 영물인 것이다.
<사진: 1900년경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서 해태상의 원위치, 사헌부 앞(현 세종문화회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 >
그렇다면 '관악산의 화기와 해태상'의 관계는 어떻게 엮어진 것일까? 세상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늘 어려운 법이다. 정의가 사라진 시대 언제부터인가 민초들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게 망가진 세상에 대해 끓어 오르는 자신들의 분노를 '관악산'에 투사(projection)해 '불'로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해태상의 기능은 본래의 정의구현의 상징성이 점차 사라져 버리고 화기를 막는 의미가 강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절대왕권이 두려워했던 '화기'란 직접적인 화재의 위험 보다 '성난 민심'이었던 것이다. 해태상은 왕조시대 통치 역학이 담겨진 정치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섬기려는 지배권력은 드물다. 이러한 인식틀은 지금도 민주공화국에서조차 소통은 둘째치고 국민을 적으로 보는 자들이 있는데서도 쉽게 발견된다. 오늘날에도 해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국민을 적으로 보려는 권력의 시각과 전투경찰의 '차벽산성'이나 물대포 등과 같은 것들이 곧 이 시대의 해태인 셈이다. 정의가 실종되면 해태는 정권을 비호하는 공권력과 총칼의 의미와 다를바 없는 '상징적 수호신'이 되고 만다. (이런 해태의 상징성을 몇해 전에 서울시가 '디자인서울' 차원에서 도시 캐릭터로 정해 놓은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면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광화문 앞의 해태상> ⓒ 김민수
그러나 해태는 안심하라. 그렇게 눈알 부릅뜨고 지키고 서있을 필요 없다. 오늘날 관악산은 더이상 '화기'의 산이 아니다. 그나마 있었던 화기의 정기도 이젠 모두 다 사그러져버렸다. 더구나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해 관악의 정기를 받아 세상 불의에 분노하고 항거하던 대학의 정신마저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내게도 산행에 원칙이 있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쉽게 대하지 않는 것. 산에 갈 때는 늘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겸허해야한다. 산을 오르는 행위는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위험할 수 있다. 올라가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잘 내려오는 일이다. 대부분 사고는 등산 보다 하산 때 많이 일어 난다.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일과 인생이 산행이다.
관악산은 코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오늘은 가볍게 공학관 너머 일반 등산로와 만나는 길을 택했다. 이 코스로 가다보면 계곡쪽 등산로와 만나 올라가게된다.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학교 저수지 쪽 능선을 타고 북쪽에서 정상에 오르는 코스로 갔을 것이다. 그쪽은 학교 안이라 등산객이 별로 없어 호젓하고 시간도 정상까지 불과 40-5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등산로 곳곳이 큰바위다. 특히 북쪽 정상 부근에 가파른 암벽 구간이 기다리고 있어 겨울철엔 매우 위험하다. 이 보다 좀 쉬운 구간은 호암교수회관 뒤편 능선을 타고 오르는 건데.. 그러나 이쪽 역시 마지막에 북쪽 암벽 구간과 만나게 된다. 이외에도 서울대 내에는 공학관 옆 자운암 쪽에서 오르는 코스도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깔딱고개에 올라서니 어느새 땀이 흥건하다. 여기저기 녹지 않은 눈들도 보인다. 하늘은 맑으나 시계가 좋지 않다. 희뿌옇다.
'관악산 해발 629m'라 표시된 정상 표지석 부근이 분주하다. 인증샷 찍고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정상에 설 연휴 시작하는 날임에도 꽤 많은 등산객들이 올라와 있었다. 일행과 사진찍고 있던 한 사람한테 사진 한 컷 부탁. 웃으며 찍어주고...
연주대에도 음력 설맞이 기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예로부터 암자가 기암 절벽에 있는 것은 이러한 장소에 영험한 기운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겠지. 30여분 정상 부근에서 머물다가 곧바로 하산. 하루가 개운하다. 세상도 개운해지길...
ⓒ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