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디자인역사문화

도시와 장소

학림

開土_getto 2015. 11. 7. 12:25

2015.11.6. 금요일

이제 가을도 떠날 채비를 하는가 보다.

작별하는 가을이 바람불고 비내리는 대학로에서 나를 추억 속으로 데려다 주었다.  

 

저녁모임이 있어 연건동에 갔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은 여전히 센데 빗방울이 좀 느껴졌다. 그러나 우산을 펼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걷기로. 시간도 아직 넉넉하고. 천천히 의대 쪽으로 내려가는데 오늘따라 옛날 내가 머물던 건물이 눈에 밟힌다. 현 서울연극센터 옆 건물. 옛 건물은 철거되고 새로 지어졌지만 이곳 2층이 내가 대학 1학년 때 작업실겸 화실을 냈 곳이다. 당시 1층에는 한의원이 있었다. 어린 시절 집 밖의 세상 속에 처음 자리잡고 꿈을 키우던 곳.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와 플라타너스 가로수 바람을 벗 삼았던 곳. 오늘 비바람이 나를 먼 과거로 이끌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세월은 흘러 1층 한의원 자리매장들이 들어섰고, 내가 있던 2층엔 카페가 들어서 있다. 환한 카페 창에 내기 시절 내가 환히 웃고 서 있다.

 

저 하늘의 별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내가 두고온 별이 있기때문이라는 <어린왕자>의 말처럼 대학로 가로엔 내가 오래전 새겨둔 아무도 모르는 추억의 장소가 있다.

  



 

오래된 기억을 밟으며 걸어 내려갔다. 사라진 '진아춘'과 '오감도'의 켜를 더듬으며 가다가 '학림'(學林) 앞에서 다시 멈췄다. 낡고 빛바랜 계단실을 올라가 세월에 닳아버린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앨범 속의 사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옛날 벽에 걸려져 있던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와 클래식 음악..겨울을 벌겋게 녹이던 기름난로.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을 싹틔우던 그 때 그 연인...송년 마지막날에 내주던 하얀 떡과 와인 한잔의 추억들. 그 옛날 난로가 있던 자리를 피아노가 대신하고, 의자와 테이블이 바뀌고 창이 바뀌었지만 옛날 그 흔적과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내 마음속의 지우개'와 같은 이 덧없는 도시에서 학림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아직 버티고 있다.  

 

 

 

 

 

 

 

 

 

시계가 추억 속에서 빠져나올 때라고 알려준다. 약속 시간이 다되어 옆 골목의 닥터스 플레이스(Dr's Place)로 갔다. 이곳은 최근 서울대 의대가 개인에게 운영권을 내주고 5년 후에 환수하는 조건으로 지어 올 봄에 문을 연 곳이다. 이곳에서 서울대에 재직중인 고교 동문모임을 갖게 되었다. 어쩌다가 4회인 내가 회장을 맡게 되어 매학기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오늘은 의대 부학장으로 있는 부회장이 이곳에 자리를 마련한 것. 내가 나온 고교는 역사가 오래된 학교는 아니지만 현재 서울대 교수로 41명이 재직 중이다. 70년대 고교평준화 세대로는 최다일지도. 이중에서 의치대 소속 동문이 17명이나 되어 가을엔 연건동에서 모이고 있다.  

 

조건과 이해관계없이 만나면 반가운 이들이 동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고교 동문들이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를 말아먹는 온상이 되기도 한다. 회장을 맡으면서 나 자신에게 한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다행스럽게 아직 우리는 역사가 짧다. 해서 오늘도 "비록 역사는 짧지만 좋은 전통을 만들어나가자"며, 같이 잔을 들때 "더 나이들어 불명예스럽게 구질구질하고 치사하게 살지 말자"고 제안했다. 

 

식사 후 자리를  옆집 학림으로 옮기는데 비가 많이 내린다. 한데 골목 쪽에 나있는 건물 출입구가 늦은 시간에는 잠기는 바람에 의대 정문 쪽으로 빙돌아 나가야 했다. 의대 터에 지은 건물이라 밤에는 경비를 위해 일반 출입구를 폐쇄할 수 밖에 없겠지..살다보면 이렇듯 가까운 길이 멀어질 수도 있다. 우산을 털고 학림에 들어서며 인생의 꽤 먼길을 돌아 옛날 그 자리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몇가지 질문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며 나왔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내가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 잘 걸어온 건걸까?

 

학림에서 문닫는 시간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셨다. 김현식의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이렇게 금요일 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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