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6. 금요일
이제 가을도 떠날 채비를 하는가 보다.
작별하는 가을이 바람불고 비내리는 대학로에서 나를 추억 속으로 데려다 주었다.
저녁모임이 있어 연건동에 갔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은 여전히 센데 빗방울이 좀 느껴졌다. 그러나 우산을 펼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걷기로. 시간도 아직 넉넉하고. 천천히 의대 쪽으로 내려가는데 오늘따라 옛날 내가 머물던 건물이 눈에 밟힌다. 현 서울연극센터 옆 건물. 옛 건물은 철거되고 새로 지어졌지만 이곳 2층이 내가 대학 1학년 때 작업실겸 화실을 냈던 곳이다. 당시 1층에는 한의원이 있었다. 어린 시절 집 밖의 세상 속에 처음 자리잡고 꿈을 키우던 곳. 여름날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와 플라타너스 가로수 바람을 벗 삼았던 곳. 오늘 비바람이 나를 먼 과거로 이끌어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세월은 흘러 1층 한의원 자리에 매장들이 들어섰고, 내가 있던 2층엔 카페가 들어서 있다. 환한 카페 창에 풋내기 시절 내가 환히 웃고 서 있다.
오래된 기억을 밟으며 걸어 내려갔다. 사라진 '진아춘'과 '오감도'의 켜를 더듬으며 가다가 '학림'(學林) 앞에서 다시 멈췄다. 낡고 빛바랜 계단실을 올라가 세월에 닳아버린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앨범 속의 사진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옛날 벽에 걸려져 있던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와 클래식 음악..겨울을 벌겋게 녹이던 기름난로.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을 싹틔우던 그 때 그 연인들...송년 마지막날에 내주던 하얀 떡과 와인 한잔의 추억들. 그 옛날 난로가 있던 자리를 피아노가 대신하고, 의자와 테이블이 바뀌고 창이 바뀌었지만 옛날 그 흔적과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계가 추억 속에서 빠져나올 때라고 알려준다. 약속 시간이 다되어 옆 골목의 닥터스 플레이스(Dr's Place)로 갔다. 이곳은 최근 서울대 의대가 개인에게 운영권을 내주고 5년 후에 환수하는 조건으로 지어 올 봄에 문을 연 곳이다. 이곳에서 서울대에 재직중인 고교 동문모임을 갖게 되었다. 어쩌다가 4회인 내가 회장을 맡게 되어 매학기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식사 후 자리를 옆집 학림으로 옮기는데 비가 많이 내린다. 한데 골목 쪽에 나있는 건물 출입구가 늦은 시간에는 잠기는 바람에 의대 정문 쪽으로 빙돌아 나가야 했다. 의대 터에 지은 건물이라 밤에는 경비를 위해 일반 출입구를 폐쇄할 수 밖에 없겠지..
살다보면 이렇듯 가까운 길이 멀어질 수도 있다. 우산을 털고 학림에 들어서며 인생의 꽤 먼길을 돌아 옛날 그 자리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몇가지 질문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스며 나왔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가?
내가 걸어온 길은 어떤 길이었는가? 잘 걸어온 건걸까?
학림에서 문닫는 시간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셨다. 김현식의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이렇게 금요일 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