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한국 도시에 세워진 역사인물 동상 중 공공미술 차원에서 으뜸가는게 뭐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추천할 수 있는게 하나 있다. 그것은 지난 2011년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조각가 심정수 선생이 제작한 '왈우 강우규 의사상'이다. 전국의 도시 곳곳에 수많은 조각상이 있지만 이 동상만큼 도시의 특정 장소에서 인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인간적 차원에서 울림을 주는 예는 그 어디에 없다.
강우규 의사(1859~1920)는 1919년 9월 2일 부산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도착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이듬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신 인물이다. 비록 사이토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강 의사의 동상은 독립에의 강렬한 의지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폭탄 투척 순간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신과 기개를 극적으로 포착해 냈다는 점에서 수많은 도시에 세워진 여느 허접한 동상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러한 울림은 이제껏 그 어떤 조각가도 담아낸 적이 없다. 일찍이 재주 많은 윤효중과 김경승이 있었지만 그들은 일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부역행위를 일삼던 친일 조각가들로 해방 후에도 살아남아 이순신 장군에서부터 백범 김구 선생 동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차단하고 표백시켜 모욕을 주었다. 해방 후 동상에서 조차 진짜 해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강우규 의사 동상에 이르러 제대로 치유되어 생명이 비로소 소생하고 동상의 형태와 내용이 합체된 궁극의 모습을 보게된다. 결연한 의지의 얼굴 표정과 눈빛. 주먹 쥔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폭탄을 꽉 쥔 오른 손을 뒤로 빼는 투척 순간의 자세. 왼발과 오른발의 90도를 이룬 각도에서 한치의 밀림도 없이 죽음과 대척하는 한 인물의 기개가 뻗어나온다. 왼발 위에 접혀진 두루마기 자락의 펄럭임은 의거 이후에 직면할 죽음의 공포와 떨림에도 흔들림없는 의사의 고뇌와 결의를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결기와 긴장감은 동상의 뒷 모습에 이르러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전환된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리는 굵은 옷주름은 마치 격랑의 강점기를 홀로 떠안고 떠나는 한 인간을 보듬어 껴안은 너른 바다와 같은 해탈감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동상은 이 해탈감을 기존의 소위 '애국 동상'이란 것들처럼 우러러 보는 높은 좌대 위에서가 아니라 낮은 위치로 내려와 세상과 시선을 맞춰 역사적 순간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상투적 애국심의 표현이 아니라 생의 유혹을 떨치고 이제 절체절명의 사선 앞에 선 '인간 강우규'의 흔들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본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랬고, 윤봉길 의사도 훙커우 공원에서 마지막에 그렇게 떠나갔을 것이다. 이는 흔히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에 덧 씌워지는 국가주의적 애국심의 상투적 포장술이 아니다. 그것은 '불의에 맞장뜨는' 존엄한 인간적 기개와 해탈로 승화시킨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작품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강 의사 동상에서 느끼는 인간적 매력과 감동이다. 안 의사와 윤 의사 같은 분들은 해방 후 누군가 만들어 세운 자신들의 동상이 국가주의 찬양을 위한 제사상에 올려지는 것 외에 그 어떤 울림도 줄 수 없고 세상과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지하에서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동상이 세워진 위치는 원래 의거 장소는 아니다. 원 위치는 (구) 서울역사 정문 왼편(북쪽)의 옆문 쪽으로 동상이 건립되기 전에 '의거 표지석'이 있던 곳이다. 강 의사는 거기서 마차를 타려는 사이토 총독을 노려 일행에게 폭탄을 투척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동상 건립이 추진되면서 서울역사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 북쪽에 세워졌다. 만일 동상을 원래 의거 장소에 세웠더라면 동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면의 남산을 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상이 정면을 향해 약 5도 정도 남산 쪽으로 틀어져 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일제는 남산에 1919년 7월 조선인에 대한 '영혼의 지배'를 위해 조선신사를 세워 태양신 아마테라스오카미(천조대신)와메이지왕을 제신으로 삼고, 1925년에 총독부가 조선신궁으로 개칭했기때문이다. 해서 사이토를 비롯해 1919년 이후 경성역에 내린 총독들은 정면에 마주한 남산 쪽을 향해 식민지 조선 통치의 각오를 다짐하는 요배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동상의 각도를 남산 쪽으로 5도만 돌려놔도 일제가 원래 식민도시 경성에 설정한 핵심 상징경관으로서 남산과 경성역을 잇는 축에 따라 사이토와 상징적 몸통 모두를 정조준한 항거의 상징성을 지니게 된다.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왜곡 등의 이유로 강우규 의사 동상이 편치 않은 것 같다. 왠지 부활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피와 죽음으로 맞서야 했던 역사를 부활시키려는 일체의 반역사적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면 역사는 반복된다.
ⓒ 김민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