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하드에서 오래전 사진 몇 장을 찾았다.
10년전 이맘 때 3인의 건축가가 우리 집에 모였다. 정기용, 조성룡, 김헌.
사진 속 정기용 선생님... 더이상 뵐 수가 없다. 정 선생님은 2005년 여름까지만 해도 대장암에서 완쾌되신듯 하다가 다시 가을부터 재발해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셨다. 집에 오셨는데 불과 몇 개월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셨다.
선생님은 끝내 회복 못하시고 마지막 남은 기운을 일민미술관 전시에 소진하신 후, 이듬해 2011년 3월 동일본 쓰나미가 있던 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일민 전시에 대해 조성룡 선생님이나 나 또한 강하게 반대했다. 190여평이 넘는 미술관 2개층의 전시공간을 말기 암환자의 몸으로 채운다는 것은 생명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봤기때문이었다. 전시가 중요한게 아니라 먼저 살려야 한다는 것이 그를 사랑한 이들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님은 자신의 사후를 직접 준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는 전시 추진하는 사람들이 정 선생님의 양쪽 팔을 깍지 끼고 죽음의 길로 끌고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에와서 생각하면 그 때 그렇게 하시고 가시길 잘 하셨다는 생각도... 유품을 본인 이상으로 잘 챙길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으리오. 그러나 내 마음 속엔 아직도 회한이 남아 있다. 정 선생님믄 2005년 늦봄 무렵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매주 한번씩 한달 이상 출현해 나와 '이 땅의 건축문화'에 대해 대담하셨다. 한데 한동안 담배 끊었던 양반이 건강 좋아졌다며 다시 피우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닌가. 몸에 해로우니 제발 피우지 마시라고 몇번을 간곡히 말씀 드렸다. 당시 사무실도 같이 쓰며 동거동락하시던 조성룡 선생님도 정 선생님의 건강을 위해 동반 금연까지 결행하고 계셨었는데... 그 때 담배 못피우시게 주변에서 더 강력히 붙들고 말렸어야 했다.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2005년 7월 통영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환갑 생신을 기념해 그 때도 같이 모여 한잔하던 밤. 이때만 해도 "건축가는 육십부터"라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실만큼 의욕적이셨건만. 통영의 밤바다 앞에서 새벽까지 무르익던 이 땅에서의 삶과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들...늘 살아계심을 느낀다. 우리의 기억 속에. 요즘들어 많이. 더. 그립다.
2009년 2월 12일 소격동 사무실에서. 막 출간된 내 졸저 <한국도시디자인탐사> 보시고 함께 기뻐해 주시던 날. 선생님은 서울미대 선배로서 여러번 내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나눠주셨다. 다른 무엇보다 선생님은 쉽게 나설 수 없는 동문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문이신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에 이어 '김민수교수 복직을 위한 3차 공청회'에 기꺼이 나와주셔서 학교의 잘못된 처사를 질타하시고 복직을 촉구해 주셨다.
또한 선생님은 내가 복직한 후 2007년경 충북 영동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화사업' 집행위원장으로서 내게 한통의 전화를 주셨다.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그 때 하신 말씀. "김 교수, 당신이 최근에 서울대로부터 학살을 체험하고 생존한 피해자이니 그 마음으로 양민학살 공원조성사업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해줘..." 이에 나는 아무 말 보태지 않고 "....네. 알았습니다" 답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한 것과 나중에 변형되었지만 노근리추모공원(현재 노근리평화공원) 조성은 그렇게 '학살의 기억'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건축과 디자인이 '마음을 담는 그릇'임을 몸소 실천해 나간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