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디자인역사문화

평론

역사와 실존

開土_getto 2017. 11. 12. 12:43

11.11.토


예정된 심포지엄이 전시회와 함께 열렸다.

바로 앞 발표자의 도착 시간이 지체되어 나의 발표가 첫번째로 진행.


제목은 "식민도시 소록도의 치유디자인."

발표에서 소록도는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강제 격리수용되어 영혼을 지배받고 죽어서 반드시 해부당한 후 육신마저 소각되어 사라지는 '궁극의 식민도시'였다.


소록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개념적 '역사 논쟁'이 아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존적 삶' 차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록도를 '육신의 실존과 삶의 중력'차원에서 조명하려 했다. 가급적 추상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으려 했다. 소록도에서 생의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근로보국대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끝내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 한센인들에 대해 생각치 않고 서구의 이론을 들이대 '역사적 관점의 논쟁거리'로 개념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허구적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론이 현실의 삶을 설명할 수 없고 누군가의 아픔에 한줌의 연민과 측은지심도 줄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닐 때 그것은 한 덩어리의 똥만도 못한 것이다.

 

예컨대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이론과 개념으로 풀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것은 '역사 속에서' 다뤄져야하고 이 공간에서 풀어야 한다. 지구의 문제를 태양계 바깥에서 논하고 풀수는 없다. 더우기 그 공간이 박근혜와 아베의 둘만의 밀실이 될 수 없음은 최근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 환대에 일본이 퍼부은 돈에 비해 껌값에 불과한 '10억엔짜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한일굴욕밀약'에서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던가. 역사 문제의 치유는 역사적 공간 속에 살았던 당사자의 입장에서 원인제공자들의 문제와 함께 다뤄져야 한다. 소록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낡은 서구의 발명품'이라서 '역사적 장소성' 또는 '장소의 기억'이 실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은 그 역사 공간 속에서 고통받고 살아간 사람들의 실존성을 외면하고 논점을 비틀어 흐려놓는 무책임한 일이다. 더우기 역설적인 것은 서구의 이론을 들이대며 역사란 개념이 서구의 발명품이니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다. 이건 뭔가. 학문의 식민성이 그린 우울한 초상.


오늘날 서구의 담론생산자들과 맹목적 추종자들은 이제야 겨우 역사문제를 주체적으로 보고 치유할 상황에 도달한 제3세계의 당사자들에게 역사를 말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는 이론을 담론이랍시고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이 또한 서구 패권주의가 지구촌에 갑질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본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가 말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경제학에서만 존재하는 말이 아닌 듯 싶다. 역사학에도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내가 어제 너를 독일어로 욕하며 죽도록 팬 것은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말한 어제의 일이니 오늘 해결할 수도 사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발언을 학문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은 누구 말대로 "공간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을 감방에 쳐넣어 공간이 어떤 것인지 체험시켜야  함"이 마땅하다. 속세의 문제는 속세에서 풀어야 한다.

 

심포지엄 말미에 발표 중 언급한 소록도 의학강습소 출신 생존자 한 분이 오셔서 시신 해부에 참여한 경험을 증언해주셨다. 이로써 발표 내용의 팩트가 좀 더 분명해졌다. 아침에 한겨례 신문에 소록도 전시와 심포지엄 관련 기사를 보고 기차를 타고 급히 올라오셨다고 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18538.html?_fr=mt2


디자인역사문화 전공생들이 많이 와서 고맙고..


심포지엄 후 식사와 뒤풀이 모임이 늦게까지 이어졌다.

많은 분들과 만나 대화한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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