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의 디자인역사문화

도시와 장소

선교장

開土_getto 2015. 8. 14. 09:32

미시령터널 넘어 속초에서 7번 국도로 들어서면 늘 기분이 좋다.

길가에 펼쳐지는 시원한 동해와 파란 하늘 그리고 많은 해변들이 청량감을 주기 때문.

해서 내게 미시령터널은 우주의 다른 시공을 잇는 좁은 통로 '웜홀'처럼 느껴진다. 

 

지글거리는 무더위를 뚫고 미시령 넘어 속초-양양-주문진- 강릉 여행길에 선교장에 들렀다. 

 

<선교장 본채 정면에는 2개의 문을 두어 용도를 구분해 사용했다. 사진 속의 솟을대문은 손님을 맞고 남성이 드나드는 문이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에는 평대문을 따로 두어 가족과 여성들이 사용했다.> 

 

1760년 효령대군의 11대손 전주이씨 이내번(李乃蕃)이 지은 선교장은 총 건물 9동의 102칸의 저택으로

지난 255년 동안 모두 4차례 손을 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조선 후기 대저택이다.

선교장은 조선시대 일반 사대부 집과 달리 왕손임을 과시하려는 듯 궁궐처럼

긴 행랑채와 마루가 높은 사랑채를 두었다. 그러나 뒤편에 낮으막한 구릉을 병풍처럼

두르고 각 건물들이 자연스럽고 짜임새있게 배치된 건축구조는 넓은 바깥마당의 연지와

정자와 어우러져 한국 전통건축의 전형적인 자연미와 함께 집주인의 넉넉한 마을씨를 보여준다.

 

주택의 이름 '선교장'은 7번국도 방면에서 접근하다보면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7번국도에서 율곡로와 만나 선교장 가는 길목에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난곡교'.

이 다리 주변 일대를 둘러보면, 얼핏 잘 보이지 않지만 경포호와 연결된 생태저류지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러한 지형적 장소성이 '선교장'에 담겨져 있다.

선교장은 한자로 '船橋莊', 곧 '배다리 큰집'. 선교장 앞이 옛날에 경포호였던 것이고, 배로 이은 다리로

접근했기에 이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

그러나 오늘날 경포호의 경관은 일제강점기에 매립되어 도로와 농지로 변형되었고, 선교장의 장소적 의미는 가려져 버렸다.

근처에 위치한 경포대에 가본 사람들은 누대가 있는 바로 밑이 호수가 아니라 도로라는 사실에 좀 의아해 할 것이다.

 

오늘날 경포호 일대는 옛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게 지형과 경관이 변형되어 있다. 

이러한 장소성은 다음의 지도를 보면 잘 드러난다. 지도 오른쪽 '경포대' 앞 도로에서 운정삼거리-김시습기념관-선교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운정로)가 옛 경포호수를 매축해 만든 도로임을 알 수 있다.

 

<지도로 본 선교장의 장소성, 네이버>

 

선교장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입장하면 '배다리 큰집'의 의미가 명칭 뿐만 아니라 조경에도

관계함을 보게된다. 선교장의 전체 공간구성은 크게 본채와 바깥 마당에 해당하는 너른 공간의 장방형 연못과

ㄱ자형의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데 본채에는 솟을대문과 평대문이 있어 외부의 출입이 통제되지만

바깥 마당의 연못과 정자에는 담이 없이 상징적 기능의 작은 문(월하문)만을 두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개방형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경은 선교장 바로 앞이 경포호였기 때문에 굳이 바깥 마당에 담장을

두를 필요가 없었기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장의 바깥마당 조경은 현재처럼 관람객 주차장 쪽의 담장으로 구획된

'울타리 안의 조경'이 아니라 경포호와 연속성을 지닌 개방형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선교장은  지나는 과객 누구도 식객으로 품을 수 있는 집주인의 넉넉한 배포와 아량

뿐만 아니라 시심을 자극하는 관동팔경의 장소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동시에 담아냈다. 

 

<선교장 바깥마당의 연못과 정자 활래정. 멀리 본채가 보인다. 원래 정자는 (사진 왼편의) 연못 가운데 인공섬에 있었는데

 1816년경 집주인 이근우가 현 위치에 중건하면서 '활래정'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활래정은 주자의 시에서 유래한다고..

한데  연못 앞에 근래 심어놓은 듯한 무궁화는 고택의 운치에 감흥을 보태지 않는다.

 

 

<선교장박물관에 전시된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홍엽산거'> 

 

'홍엽산거'란 '붉은 단풍처럼 산에 살리라'라는 뜻. 산의 단풍이 자신을 붉게 소진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살다가 사라지겠다는 추사의 결연한 '비움의 미학'을 담고 있다.

한데 이 현판에서 추사가 마지막 글자 '살거, 居'자의 '주검시,尸'변을 뒤집힌 형태로 써놓은 것이 재미있다.  

이는 단풍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덧없이 사라지리라는 심정을 '주검시'를 반전시켜 놓음으로써 '살아서 육신'으로 

철저히 지키겠노라는 의지를 풍류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시심과 풍류가 이쯤되는 추사급의 손님이라면 선교장 주인은 최고의 사랑채인 열화당에 묵게하면서 큰 대접을 했을 것이다.

 

<연못과 활래정에서 본채를 잇는 너른 마당. 뒤편의 구릉에 오르면 500년 이상된 노송들이 아름드리 자태로 뻗어 오른 장관이 펼쳐진다>

 

 

<본채의 동별당>

 

 

<안채>

 

<서별당>

 

<서별당에서 우측 열화당을 잇는 쪽문>

 

<서별당에서 바라본 정면>

 

<왼편의 안채와 연결된 서별당 내부>

 

<열화당. 선교장 내에는 모두 3채의 사랑채가 있는데 이중에 열화당은 선교장의 대표 건물이자 최고의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 열화당은 1815년 집주인 오은처사 이후가 건립>

 

 

<앞쪽 동판 지붕의 차양은 열화당에 묵었던 구한말 러시아 공사가  감사의 표시로 선물했다고 한다.

이처럼 초석에 기둥을 세우고 맛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이루는 구조는 창덕궁 연경당 선향재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화당 정면>

 

 

<열화당이라는 말은 '가족끼리 모여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집'이라는 의미.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

 

<열화당의 차양 구조>

 

<열화당 앞의 중사랑채(정면)와 줄행랑채(왼편).

 

 

<건물과 건물 사이. 다른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의 지붕처마가 서로 만나 닿을 듯 말 듯 절묘한 접합을 이룬 모습.>

 

선교장의 건물들은 한번에 모두 지어진 것이 아니라 250여년에 결쳐 대물림되면서 새로 증축되는 등

4차례의 변화를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조화와 짜임새를 잘 유지하고 있다. 

 

전통의 계승 발전이란 이런 것이다.

계승하되 원형의 정신을 잊지 않고 새로운 필요에 부응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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