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5. 수요일.
첫 눈이 내렸다.
오전에 정문 들어서는데 간밤에 눈 쌓인 관악산의 자태가 안개에 가려 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기분이 묘해진다.
오늘은 연강이 있는 날. 오전에 대학원 <디자인역사비평> 수업하고 점심 후 1시간의 틈새 시간이 생긴다. 2시부터는 '디자인사' 강의를 해야 한다.
막간을 이용해 앰프에 불을 지피고 오랜만에 필립 글래스의 첼로협주곡 2번 '나코이콰치'(Naqoyqatsi)를 크렐 CDP에 올렸다. 눈쌓인 관악산의 신비한 자태 속 스산한 겨울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곡이다. 제목 '나코이콰치'의 뜻은 '전쟁같은 싦'(Life as War). 이 곡은 원래 글래스가 갓프리 레지오 감독의 영화음악으로 제작한 것을 7곡의 첼로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이다. 현대문명 속에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을 해석했는데 CD자켓 디자인이 맘에 든다.
피터 브뤼겔의 '바벨탑'이 '나코이콰치'의 강력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은유다. 전쟁같은 인간 삶이 구축한 궁극의 결과가 무너질 바벨탑이라는 것. 자켓 디자인이 상징하는 바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산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뭘 위해 왜 사는지 아무도 묻거나 답하지 않는다. 그저 악착같이 살고 살아야 한다. 허망한 것은 그토록 악착같이 전쟁하듯 살아도 행복하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 브뤼겔이 바벨탑 그림속에 깨알처럼 묘사해 놓은 건축 노동자들의 분투적인 일상이 그러하듯...
자켓 디자인에 사용된 '바벨탑'은 브뤼겔이 그린 3점의 바벨탑 중 세번째 작품이다. 브뤼겔은 1553년에 미니에춰 전문가와 공동작업으로 상아에 아주 작은 그림으로 바벨탑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두번째 바벨탑 그림은 1563년에 그려져 현재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상에는 이 그림이 많이 알려져 있다. 축소된 크기로 세번째 바벨탑이 그려진 것은 이듬해인 1564년. 바로 이것이 현재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뵈뉭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글래스의 자켓 디자인에 사용된 바벨탑이다.
주목할 것은 이 두 그림에서 바벨탑이 건축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번째의 1563년 바벨탑은 고대 로마의 콜롯세움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상상된 그림인 반면 1564년 바벨탑은 축조기술에 있어 보다 아키텍토닉한 형태로 발전된 것이 특징이다. 물론 헛된 바벨탑 축조 과정의 고된 인간 노동자들의 우화적 서사는 두번째 바벨탑 그림이 훨씬 더 풍부하다. 하지만 브뤼겔은 세번째 그림에서 바벨탑을 건축적으로 진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음악 '나코이콰치' 자켓에 브뤼겔의 세번째 바벨탑이 사용된 것은 당연한 귀결. 자켓 디자이너의 생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코이콰치>의 4번째 곡 'Intensive Time'이 겨울 속으로 깊이 끌고 들어간다.
브뤼겔의 세번째 바벨탑(1564) 그림이 담긴 필립 글래스의 '나코이콰치' 자켓 디자인.
The Little Tower of Babel,1564. Oil on panel, 60 x 74.5 cm
Museum Boymans-van Beuningen, Rotterdam
브뤼겔의 두번째 바벨탑(1563)
The Tower of Babel, 1563. Oil on oak panel, 114 x 155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