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교수의 디자인역사문화

평론

정기용

開土_getto 2015. 11. 28. 17:41

나는 예전에 부활이니 뭐니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종교에서나 하는 말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점차 나이들면서 종교하고 무관하게 부활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한 인간의 육신은 땅에 묻히거나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하지만 정신과 삶의 족적은 산자의 기억을 통해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 인간은 산자의 기억을 통해 부활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후에 아카이브를 통해 부활해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한 인물이 있다. 건축가 故 정기용(1945~2011).

 

정기용 선생은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운 2010년 자신의 생애를 일민미술관 전시로 스스로 정리하고, 이듬해 3월 사랑하는 이들을 뒤로 한채 세상을 떠나갔다. 당시 주요 전시물을 일민미술관이 사유화하려하자 건축계와 지인들이 반발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건축 아카이브를 만들어 영구 소장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결과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전시가 열렸다. 애초 이 전시는 사후 2주기를 기념해 2013년 2월 28일 부터 9월 22일까지 열릴 계획이었는데 성황을 이뤄 연말까지 연장 전시되었다. 

 

<그림일기...> 전시는 단순히 건축계를 넘어서 한국 문화예술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이로 인해 많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삶과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반추해야만 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자신들의 사후에 무엇이 남겨질지 이제껏 별 고민하지 않았던 '삶' 자체가 과제로 되었기때문이다. 당시 전시에는 고인이 자신의 생애를 '일기'쓰듯 기록하고 남긴 아카이브 2만점 중에 2천여점이 전시되었다. 또한 전시 방식도 그가 생애 동안 사색하고 걸었던 삶의 여정을 따라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그의 진솔한 삶의 궤적이 잘 조명되었다. 나는 이 전시회가 최근 증가하고 있는 '미술관에서의 건축 전시회'에 대한 모범적 사례일 뿐만 아니라 건축을 문화적으로 고양시키고 대중적으로 이해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사건 내지는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이라 본다.

 

이 전시에서 무엇보다 귀감이 된 것은 전시 첫부분이 '철학적 뿌리'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술관에서 대부분 작품 위주의 전시에 익숙했던 관람객들에겐 다소 낯선 모습이었을 것이다. 정기용의 <건축의 뿌리>에는 그가 프랑스 유학 시절 공부하면서 읽은 책들이 벽면에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공예 전공으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1972년 파리에 유학해 1986년 귀국하기까지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을 모두 공부한 드문 인물이었다. 

 

유학 시절 정기용은 프랑스 68혁명의 기운을 몸으로 체험하고 이 후 그의 사상적 근간을 이룬 역동적 문화와 문헌들을 접했다. 미셀 푸코의 철학에서부터 앙리 르페브르의 사회철학에 이르기까지 고답적 근대 철학과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지식과 문화담론에 기초해 건축과 사회 사이의 현실 문제를 고민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귀국 후 한국의 사회 현실과 구조적 모순에 대한 도시건축적 발언과 실천으로 이어졌다. 일례로 그는 무주군 안성면사무소(1997)에서 보여준 주민을 위해 목욕탕과 보건소가 딸린 면사무소나 등나무가 자라난 무주공설운동장 생태그늘 버팀대(1997) 등은 정기용의 '공익정신'과 건물에 앞서 인간과 사회를 먼저 품는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만든 결과였다. 

 

그는 세상 떠나기 전 일민미술관 전시 강연에서 칠판에 마지막 힘을 모아 판서하며 "모든 문제는 이 땅에 있으며 해결책도 이 땅에 있다"고 외쳤다. 그는 진정 이 땅을 사랑한 건축가였다.

 

 

 

 

 

 

 

  무주군  안성면 덕유 개발계획 마스터 플랜, 1997

 

    무주군 안성면사무소 배치도, 1997.

 

무주군 안성면사무소 모델, 1997.

 

무주 공설운동장 생태그늘 버팀대 드로잉

 

 

 

 

제주 4.3 평화공원 배치도

 

순천 기적의 도서관 모델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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